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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노트

안치운 산문<그리움으로 걷는 옛길>, 눈부신 초록의 오지

by 이야기캐는광부 2016.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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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운 산문집<그리움으로 걷는 옛길>을 그리움과 설렘, 걱정으로 읽었다. 먼저 책에 나오는 아름다운 오지와 자연의 옛길이 지금 이 순간 온전히 남아있을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옛길에 처음 발을 내딛는 설렘도 있었다. 책을 덮는 순간 옛 길들이 하나하나 그리웠다. 마치 오래전 옛길을 다녀 오기라도 한 듯이. 이 책을 읽는 것은 '걷기'와 비슷하다. 한 장 한 장 천천히 내딛으며 사유가 벌이는 축제를 즐길 수 있으므로. 



길을 걷는 다는 것은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발을 옮기지 않으면 내 위치는 한 치도 변하지 않는다. 같은 동작을 수없이 해도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발걸음이다. 걷는 것은 자발적인 움직임이다. 걸음은 최적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추상적인 느낌을 걸으면서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배워서 걸은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많은 것을 다시 배울 수 있었다. 걸은 적이 있는 길을 다시 걷더라도 부질없다고 여긴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산속에서, 옛길 위에 머물면서 나는 이루말할 수 업을 만큼 즐거웠다. 걷는다는 행위는 매 순간 사유가 벌이는 축제와 같았다. 걸을 때면 몸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사유는 근원적인 방향으로 향한다. 눈에 보이는 것, 발 아래 밟히는 것, 귀에 들리는 모든 것들이 본질로 와닿는다. 길을 걷다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는 순환적 몽상에 바질 때가 있다. 진정으로 사물과 친근함을 지니기 위해서는 걸어야 한다.

-23쪽-


분교를 나와 걷가보면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떠난 집들을 만난다. 텅 빈 집들의 풍경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이 살다 떠난 집은 서글프다. 집들이 그리움에 지쳐 있는 것 같다. 집도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다시 본다. 늙어간다는 것은 낡아가는 것과 같은 바탕의 말이다. 빈집은 멈추어 있는 산이 흐르는 강물을 벗하듯 하지 못한다. 집은 사람을 품었던 터가 아니었던가. 사람을 놓아버린 집들은 과거의 시간과 기억으로 버텨간다. 텅 빈 집은 마당에 나와 앉아 하릴없이 서성대며 삶의 끝장을 기다리는 노인과 같다.

-62쪽-


지도를 펼쳐서 인제의 상남으로 갈 궁리를 했다. 길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길은 사람들이 만든 욕망의 지도와 같다. 옛사람들이 그런 지도를 가지고 오늘의 사람들이 찾는 것은 과거의 길뿐만 아니라 길에 담긴 욕망과 흔적이다. 옛길을 찾고 걷는 행위는 시간의 역사의 질량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옛길은 지난 역사와 삶의 전체성을 회복할 수 있고, 그것들이 지닌 의미를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110쪽-


등반은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이 낮은 곳에서 저 높은 곳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 될 것이다. 제 삶의 무게와 같은 등짐을 지고 흘리는 땀을 바람에 건조시키고, 가슴에 혹은 몸 안에 있는 날것들을 햇빛에 익히는 것 같다고 말하면 좋겠다. 그렇게 오르며 이 세상이 시작된 이래 이 자리에 있으면서 모든 기억을 온전하게 품고 있는 바위를 애무하고 껴안는 것이 아니겠는가? 등반을 하다보면 깨닫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위가 있을 뿐이지 사실 바윗길은 없다는 것이다. 바윗길을 오르는 산사람의 행위는 바위에 투항하는 것도 아니고, 바위에 복종하는 것도 아니다. 바위가 이 세상의 화석과 같은 모임고, 길인 셈이다.

-180쪽-


오지란 멀리 떨어진 곳이며, 깊숙한 땅을 뜻한다. 쉽게 말하면 오지는 내안이 아니라 바깥이다. 그런데 그 바깥으로 가보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내안이 답답하기 때문이다. 바깥이 없다면 그것만큼 답답한 일은 없을 것이다. 갇혀 있는 것을 상정해보면 이해가 쉽다. 바깥은 새로운 만남의 장소이다. 오지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자연이다. 자연은 내게 거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그곳에 가면 시적인 감흥이 절로 일어난다.

과연 자신의 나이를 잊고 영원한 젊음을 느낄 수 있고, 싫증을 느끼지 않으면서 자기 집착에 빠지지 않는 그런 곳이 있을까? 요즈음 세상에는 살맛보다 허망함, 부질없음이 많다. 살맛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날 내게 살맛이란 살아가면서 세상을 살맛나는 곳으로 여기고 만드는 데 있기보다는, 살맛의 반대말인 죽을 맛을 견뎌내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살맛이란 삶은 허망하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허망함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삶의 감각일 것이다. 그것은 사라지는 삶을 주목하고, 삶의 편린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사라지고 죽는다는 공포를 넘어 성장할 수 있는 힘이다. 또한 그것은 삶이 덧없다는 것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사라진다, 죽는다라는 것을 망각한 삶이야말로 경박한 삶, 허위의 삶이 아닐가? 그런 곳에 살맛은 없을 것이다.

-191~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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