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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노트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18, 20,21권 밑줄 그은 문장

by 이야기캐는광부 2016.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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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통오달의 광장에 서서 여행가방을 팔에 낀 영광은 담배를 뽑아물고 두 손으로 바람을 막으며 담뱃불을 붙인다. 언제나 그랬지만 가슴이 설레었다. 어디든 떠단다는 것은 새로움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다른 하나의 자신이 마치 번데기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폐쇄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문을 열고 나서는, 그것은 신선한 해방감이다. 그러나 새로움이란 낯섦이며 여행은 빈 들판에 홀로 남은 겨울새같이 외로운 것, 어쩌면 새로움은 또 하나의 자기 폐쇄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마주치는 사물과 자신은 전혀 무관한 타인으로서 철저한 또 하나의 소외는 아닐는지.

-박경리 <토지> 제18권, 233쪽-



어제 일같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왜 그때 일이 생각났을까? 서희는 아마도 마을 아낙이 와서 통곡을 한 때문에 그 기억이 되살아났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기억은 땅에 묻어두었다. 이곳 평사리에 갈피갈피 접어서 묻어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구백 생멸(生滅)이 있다는 한 찰나, 찰나의 연속이 아니던가? 하면은 내가 억겁을 살았단 말일까? 그것이 시공을 뚫고 가는 섬광이었다면 나는 한 찰나를 산 셈이 된다. 그러나 한 생명이 땅과 하늘 상에 있는 이상 기억은 생명과 더불어 떠나지 않는 것, 그것이 한이로구나. 죄업이든 슬픈 이별이든 또는 만남이든 횡액이든, 기억에 사람들이 뿌리를 내렸던 곳이며 내 또한 뿌리를 내렸던 곳, 아아 기억, 수많은 기억들은 억겁의 길만큼이나 길고도 많구나. 서희는 망망대해에 던져진 것처럼 기억의 바다에서 자맥질하다가 간신히 현실로 돌아온다.

-박경리 <토지> 제20권, 182~183쪽-



인간을 습관의 동물이라고 한다. 어디 인간만이겠는가. 무릇 모든 생명에는 모두 습성이 있게 마련이다. 제각기 독특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에게는 선악으로 구분 짓고 도덕이라는 균형을 정하는 이성이 있으며 영성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이 있다. 그것이 다른 생명들과 다른 점이다. 그러니 선악의 기준이 없는 다른 생명들은 본성을 감출 필요도, 본성을 간파할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 허위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가지 없을까. 어미 잃은 새끼고양이가 공포와 절망 때문에 울부짖는 소리를 우리는 들을 수 있고 한발에 목말라하는 식물, 비바람에 뿌리를 지키기 위한 식물의 저항을 볼 수도 있다. 그와 반대로 어미 곁에서 재롱을 피우며 경계심이 없는 새끼 고양이, 화창한 날씨 싱그러운 햇빛 속에서 식물들 소용돌이는 경쾌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모두 원래의 형체와 별 상관이 없는 과정(시간)과 환경(공간)에 의해 빚어지는 상황이다. 물론 인간도 원칙적으로 숙명적 형체로 태어나 과정과 환경에 지배를 받지만 그의 욕망은 무한하고 사물의 인식은 헬 수 없이 다양하며 사고의 갈래 또한 무궁무진하다.

-박경리 <토지> 제21권,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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