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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책 <옛 그림읽기의 즐거움 1>에 풍덩

책노트

by 이야기캐는광부 2012. 11. 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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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 외박 다녀오겠습니다."


2006년 군복무 시절,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낭랑하고 밝았다. '룰룰라라' 휘파람 불며 부대에서 버스를 타고 나와 청량리역에서 내렸다. 나올 때는 즐거웠지만 막상 자유시간이 주어지니 막막했다. '뭐 하고 논담..혼자서...' 선, 후임들과 외박 일정이 맞지 않아 낮에는 영락없이 홀로 지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친구들도 대학생이라 수업중이었다. 문득 국립중앙박물관을 태어나서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 거기나 가자!' 


군복을 입고, 일병 모자를 눌러 쓴 채 박물관에 들어갔다. 군인이면 조금 할인혜택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곳에서 운명의 그림 한 점과 만났다. 바로 추사 김정희의 1844년 작품 <세한도>다.  '이게 그 유명한 세한도란 말인가...'하며 한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교과서에서 봤던 대로 나무 몇 그루와 집으로 보이는 건물이 가운데 놓여 있었다. 


1844년, 국보 180호

수묵화, 23 × 692cm, 국립중앙박물관



교과서에서 봤을 때는 무척 작은 그림인 줄 알았는데 꽤 큰 그림이었다. 당시는 몰랐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들이 어떤 의미기 있는 지, 어떤 사연이 들어있는 지 말이다. 이런 나의 무지를 책<옛 그림읽기의 즐거움>이 깨트려 주었다. 옛 그림을 보면 그저 생각없이 보는 일이 많았던 내게 그림속에 이렇게 다양한 뜻과 이야기가 숨겨있었구나하는 깨우침을 주었다. 저자 오주석씨는 수려한 문장으로 들려준 <세한도>의 이야기가 가슴속을 파고 들었다.


<세한도>에는 염량세태의 모질고 차가움이 있다. 쓸쓸한 화면엔 여백이 많아 겨울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데 보이는 것이라고는 허름한 집 한 채와 나무 네 그루뿐이다. 옛적 추사 문전에 버글거렸을 뭇사람들의 모습은 커녕 인적마저 찾을 수 없다. 화제를 보면 '세한도(歲寒圖) 우선시상(藕船是賞) 완당(阮堂)'이라고 적혀 있다.

'추운 시절의 그림일세, 우선이! 이것을 보게, 완당'이란 뜻이다.(중략)

이런 텅 빈 느낌은 바로 절해고도 원악지에서 늙은 몸으로 홀로 버려진 김정희가 나날이 맞닥뜨려야만 했던 씁쓸한 감정 그것이었을 것이다. 까슬까슬한 마른 붓으로 쓸듯이 그려낸 마당의 흙 모양새는 채 녹지 않은 흰 눈인 양 서글프기까지 하다.

- 157쪽 -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1786~1856)가 1844년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로 제주도에서 5년째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 그린 그림이다. '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추자의 제자 우선 이상적(1804~1865)을 가리키는데,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가 자신을 대하는 한결같은 제자의 마음에 감격하여 그려 보낸 작품이라고 한다.


추사는 제주도로 유배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친한 친구인 김유근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영원히 이별하기 까지 했다. 또 반대파들의 끊임없는 박해를 견뎌내야 했고, 서울 친구들의 소식은 점차 끊어졌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유배가기전이나 유배를 간 이후나 늘 자신을 한결같이 대하는 제자 이상적에게 감동했으리라. 추사는 그 마음을 인문에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글로 담아 보냈다. 장무상망은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애틋한 뜻이 담겨 있다. 



▲ 인문에 찍힌 '무상망(長毋相忘)'


이런 그림을 두고 2006년 군인이었을 때 그저 멀뚱멀뚱히 바라만 보았다니! 지금 생각하면 내 자신이 한심하다. 추사는 유배생활동안 자신의 주변에 '진정한 사람'이 없으니 외롭고 쓸쓸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서 소나무처럼 향기를 잃지 않고 꿋꿋이 추운 겨울을 이겨내리라는 단호한 결심 또한 섰을 것이다. <세한도>는 추사가 자신의 마음을 나무 네 그루와 집 한 채 그리고 텅빈 여백에 절절하게 투영한  것이리라.


그리고 <세한도>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지만, 사람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일까? 나도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오주석씨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추사는 <세한도>에 집을 그리지 않았다. 그 집으로 상징되는 자기 자신을 그렸던 것이다. 그래서 창이 보이는 전면은 반듯하고, 역원근으로 넓어지는 벽은 듬직하며, 가파른 지붕선은 기개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림이 지나치게 사실적이 되면 집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옛 그림을 눈으로만 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171쪽- 


설명을 듣고 보니 그림속 집의 형태가 이상하긴 했다. 지붕은 원근법대로 뒤로 갈수록 좁아지는데, 벽은 또 그렇지 않았다. 그림은 아는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모르면 그저 그림의 여백만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끝난다. 





이 책은 이렇듯 옛 그림 여백 너머의 깊은 뜻을 독자의 눈 앞에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저자의 그림 해석은 내 마음속에 새로운 의미의 수묵화를 탄생시킨다. 그저 여백으로만 보였던 것이 의미를 가지고 꿈틀대기 시작한다. 그림을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읽을 줄 알게 된다. 읽다 뿐이랴. 그림을 제대로 느끼고 감상할 줄 알게 된다.

그러다보면 그림과 물아일체가 되는 축복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듯이.


좋은 그림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은 행복하다. 바쁘게 서두르다 보면 참맛을 놓치게 된다. 찬찬히 요모조모를 살펴보고 작품을 통하여 그린 이의 손 동작을 느끼며 나아가서 그 마음자리까지 더듬어 가늠해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정녕 시간을 넘어선 또 다른 예술 공간 속에서 문득 그린 이와 하나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자기 바깥의 무엇엔가 깊이 몰두하고 있다는 것은 유한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하나의 축복이다.

- 6쪽, 저자 서문-


이 책의 저자가 지금은 세상에 없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수려한 필치로 그림의 뜻을 어루만져주는 그의 책들은 더이상 나오지 못할 것이다. 대신 이전의 작품인 <한국 美 특강>과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2 >, <그림속에 노닐다>, <단원 김홍도>등을 통해 아쉬움을 달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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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오주석

서울대 동양사학과, 동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더 코리아헤럴드 문화부 기자, 호암미술관 및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원을 거쳐 중앙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간송미술관 연구 위원 및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했다. 단원 김홍도와 조선시대의 그림을 가장 잘 이해한 21세기의 미술사학자라 평가받은 그는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강연을 펼쳤으며, 한국 전통미술의 대중화에 앞장선 사람이다. 2005년 2월 49세의 나이에 혈액암과 백혈병을 얻어 스스로 곡기를 끊음으로써 생을 마쳤다. 




▲ 책 뒷 표지.


▲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옛 그림읽기의 즐거움 =그림<고사관수도>에 나오는 사람처럼 물끄러미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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