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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노트

박범신 장편소설 <주름>, 내가 밑줄 그은 문장

by 이야기캐는광부 2015.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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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주름>을 단순히 부도덕한 러브 스토리로만 읽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시간의 주름살이 우리의 실존을 어떻게 감금하는지 진술했고, 그것에 속절없이 훼손당하면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반역하다 처형된 한 존재의 역동적인 내면 풍경을 가차 없이 기록했다고 여긴다.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단두대를 준비해두고 있다." - 박범신 작가의 말- 


작가 박범신이 스스로 참 추억이 많은 소설이라 밝혔던, 장편소설 '주름'을 읽었다. 이 소설은 작가가 1999년 발표한 장편소설 '침묵의 집'을 두 번에 걸쳐 분량을 줄이고, 표현을 다듬어 개작한 작품이다. 


박범신 주름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주름은 '피부가 쇠하여 생긴 잔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가 말한 '시간의 주름살'이란 무엇일까.


시간의 피부가 쇠하여 생긴 잔줄일까. 아니면 우리네 삶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다 생긴 상처일까.

시간의 피부는 개나리꽃처럼 노랄까. 밤하늘처럼 까말까. 아니면 살색일까.


부모님 얼굴의 주름을 보면 고생스런 삶과 다시 펴지 못하는 옛꿈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시간의 주름살은 회한과 한숨일까. 어머니의 자궁을 막 나왔을 때 내 얼굴의 쭈끌쭈글한 볼 살일까. 새 생명처럼 돋아나는 새 살일까. 파멸과 죽음의 뒷모습일까.


시간의 주름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다만 생성과 소멸의 속성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괴롭힌다는 것을 안다.  


작가의 '시간의 주름살'이라는 표현때문에 무형의 시간이 눈에 보이는 유형의 시간으로 다가온다.


'시간'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소설속 주인공인 김진영과 천예린이 벌이는 죽음같은 섹스, 그게 아닐까.


침대위에서 생성과 소멸이 서로의 살을 빨고, 핥고, 피고름까지 빨아먹는. 절정으로 치닫다가 순식간에 밀려오는 허무함, 영원을 허락하지 않는 짧고 잔인한 쾌감. 서로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생성'이라는 괴물과 '소멸'이라는 괴물이 벌이는 치열한 싸움. 결국에 시간은 둘다 '텅 빈'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게 아닐까.  


'시간'은 우리 삶의 주름살을 찢고 관통하는 총알인가. 아주 천천히, 때로는 너무도 빨리 관통하는 총알인가.아니면 삶의 주름살을 깊숙히 파고드는 예리한 칼인가.  


아닐지도 모른다. '시간의 주름살'은 누군가가 웃을 때 생기는 잔주름을 닮았기도 하다. 아픈 손자의 배를 어루만지는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약손, 보양식으로 먹을 수 있는 늙고 주름진 호박.... 어떨 때는 시간이 생성과 소멸이 아닌 '치유'와 '회복'의 모습이기도 하지 않을까.


소설 '주름'을 읽고 수많은 상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시간의 주름살'을 알지 못한다. 주름을 다 읽고도 알수없는 힘에 이끌리듯 다시 첫 장을 펼치고, 밑줄 그은 문장을 곱씹는다. 혹시나 여러번 읽다보면 '시간의 주름살'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과실 속에 씨가 있듯이, 태어날 때 우리는 생성과 소멸, 탄생과 죽음이라는 2개의 씨앗을 우리들 육체의 심지에 박고 태어난다. 생성과 소멸은 경계없는 동숙자이다."-주름 9쪽-


"이제 말이야, 내 등 뒤에 유령처럼 서 있는 나의 옛꿈을 찾아갈 거라고. 유령처럼 서 있는 옛꿈. 당신 눈엔 그게 안 보여? 유령처럼 당신 등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옛꿈 말이야."-주름 73쪽-


"삶이란 때로 그렇다, 평온하고 안정된 삶일수록 은밀히 매설된 덫을 그 누구든 한순간 밟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생의 심연이 지닌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권한일는지도 모르겠다. 생이라고 이름 붙인 여정에서 길은 그러므로 두 가지다. 멸망하거나 지속적으로 권태롭거나."

-주름 103쪽-


"오직 산화하고 싶다."-주름 117쪽-


"과실의 중심에 씨가 있듯이 우리들의 중심엔 언제나 죽음이 있다고 시를 통해 말한 것은 바로 천예린, 그녀였다. 그녀의 시에서, 북극해는 죽음과 동의어였다. 모든 존재의 중심에 수심 5000미터가 넘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아무런 소리, 색깔, 움직임도 없는 북극해가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마 천예린의 지향을 쫓아 그곳에 간 모양이었다. 염려하지 말라면서, 북극해를 보았으니 곧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아버지는 편지의 마지막에 덧붙이고 있었다. 베르호얀스크까지 여행한 걸 보면 건강도 어느 정도 회복한 듯해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소식이었다."-주름 151쪽-


"나는........어, 떻, 게........살아왔던가.

한참 만에 벙어리처럼, 그런 말이 내 입에서 더듬더듬 나왔다. 그 신생의 대륙에서 만나는 새벽과 지나간 연대의 내 삶이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물론 나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킬리만자로의 정상과 고요하게 대면한 어떤 순간에, 내 지나간 평생의 삶이 온갖 억압에 가득 차 있는, 감옥 속의 삶이었다는 생각이 홀연히 드는 것이었다. 

그래. 내 삶은 감옥살이였어. 나는 부르짖었다. 그것은 극적인 자각이었고 고통스러운 세례와 같았다. 과장, 부장, 이사가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이 성취인 줄 알았다. 쇠창살이 늘어나는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내가 사는 인생이 다 내가 설계해 노력으로 얻어낸 것인 줄 알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쥐어짜이듯 아팠다. 킬리만자로 흰 봉우리가 나를 무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름 207쪽-


"어떤 이는 숙명이라고 부른다. 그 당장엔 우연처럼 일어나 우리들을 끝없이 번민시키고 또 분열하게 하는 것. 그렇지만 종국엔 아퀴가 딱 맞춰진 듯 옴짝달싹할 수도 없게, 우리가 거기 좌초할 수밖에 없었다고 느껴지도록 하는 것, 합리주의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으나 이렇게 저렇게 오감 열고 느끼면 제몫몫, 원인과 결과, 넘치더라도 모자라지도 않게 짝을 채워 제자리 찾아 앉는 것, 인생을 나는 보다 모던한 말로 예비된 프로그램이라 부르고 싶다.살다보면 누구나 두 갈림길에 놓이게 마련이라고 어떤 시인은 읊었거니와, 그것이 두 갈림길이 아니라 세 갈림길, 또는 열 갈림길, 백 갈림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의 초입에서 느끼는 혼란과 분열일 뿐, 결국 그 길을 다 통과해 지나오고 나서 돌아보면, 그렇고 말고, 그 모든 길은 다만 하나로 이어진 어떤 불가항력적 프로그램 속에 입력된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이름의 미로 게임이다." -주름 237쪽-


"그녀는 언젠가 실토했다. 내가 병들고 나서 깨달은 한 가지는, 우리가 우리들의 본능을 너무도 존중하지 않는 삶의 체제 속에 놓여 있다는 거였어. 그녀의 전반기 삶은 그래도 그 체제와의 불화를 줄이려고 노력했으나, 그녀의 후반기 삶은 그 체제와의 불화를 오히려 극대화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었다."

-주름 294쪽-


"내 자아라고 생각했지만, 기실 사회구조 속에서 훈련받은 가짜 자아, 그 허위를 깻박치고, 평생 억눌려 있던 본질적인 나의 다른 자아를, 그녀는 부드럽게 끌어내어 동등한 우의로 그것을 존중해주었다. 내가 수치스럽다고 여기어 한사코 폐기 처분 했던 본능을 존중해준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녀는 최종적으로 내가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었을 뿐 아니라, 친구로서 연인으로서 대등하게 그것을 받아들여주었다.

그것은 내가 일찍이 상상하지 못했던 행복이었다."-주름 294쪽-



독서모임 산책

 


대전독서모임 산책 7월 모임


일시 : 7월 6일 월 오후 7시 30분

장소 : 라푸마둔산점 2층 여행문화센터 산책

준비물 : 소설 '주름'과 편안한 마음

회비 : 5,000원 커피와 다과





박범신 주름 자유 낭독회


일시 : 7월 11일 토 오후 5시

장소 : 라푸마둔산점 2층 여행문화센터 산책

내용 : 오프닝 공연, 자유 낭독회, 사인회, 저자와 대화의 시간 등



박범신 주름 자유 낭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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